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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너스 (Beginners. 2011)

by 집구리 2024. 1. 30.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기본정보

이 영화는 감독 마이크 밀스가 각본을 쓰고 북미에서 2010년, 한국에서 2011년 개봉한 영화이다. 감독 마이크 밀스가 실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한 이력이 있고 그의 아버지가 75세가 되던 해에 커밍아웃을 했다고 하니 감독 본인의 이야기를 많이 차용해서 각본을 집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이완 맥그리거가 올리버 역으로 남자주인공 역할을 하였고 멜라니 로랑이 애나 역으로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그리고 주연보다 더 중요한 올리버의 아버지 할 역할에  고전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매력적인 폰 트랩 대령으로 등장했던  크리스토퍼 플러머라는 노년의 명배우가 작품의 전체적인 무게를 잡아주며 흔한 로맨스나 퀴어물이 아닌 인생을 관통하는 삶의 자세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줄거리

어머니와 사별 후 6개월. 올리버의 아버지 할은 커밍아웃한다.

아버지는 결혼생활 내내 책임과 의무를 다했지만 그의 어머니의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런 부모님의 결혼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올리버는 감정에 대한 표현이 서툰 사람으로 자랐다. 성인이 되어서도 네 명의 연인을 만났지만 '잘 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들이 떠나가도록 두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커밍아웃을 하고나서 열정적으로 게이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연인을 만나며 4년을 보냈다. 그러다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올리버는 부친의 집을 정리하고 아버지의 반려견 아서를 집으로 데려온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올리버의 현재 이야기와 과거 부친과의 이야기,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잠깐씩 보여주며 영화가 진행된다. 

아버지의 별세 후 침울하게 지내며 일러스트 작업에만 파묻혀 있는 올리버. 올리버가 진정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잭 러셀 테리어 아서밖에 없다. 그러던 중 올리버의 작업실 동료들이 한 파티에 반 강제적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애나를 만난다. 

'슬픈데 왜 파티에 왔죠? ' 필담으로 묻고는 슬픈 눈동자를 종이에 그리는 그녀를 보며 올리버는 왠지 모를 관심이 생긴다. 올리버는 애나와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되고 싶지만 과거 어긋나기만 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애나와의 관계에서도 자꾸만 뒷걸음친다. 애나도 16살부터 집을 떠나 배우로 여기저기 떠돌며 사는 이유로 올리버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할은 살아생전,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 나섰다. 그의 파트너 앤디는 암으로 투병 중인 할을 작은 선물과 장난으로 해맑게 웃게 해 주었고 또 어느 날은 햇살이 쏟아지는 창 아래 누워 같이 달콤한 낮잠을 잤다. 그를 위해 불꽃놀이와 환호성을 친구들과 함께 녹음해 병실의 할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올리버는 그 당시에는 아버지와 그의 동성 연인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당혹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진실한 사랑의 장면은 애나와의 사랑에서 올리버에게 용기를 준다. 애나가 올리버의 집으로 들어 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짐을 풀지 않는 애나와 불안한 올리버는 다투게 되고 그 길로 애나는 올리버의 집을 나가버린다. 올리버는 앤디에게 아서를 맡기고 애나를 붙잡기 위해 용기를 내어 엘에이에서 뉴욕으로 간다. 뉴욕 애나의 집 앞에서 전화를 거는 올리버. 하지만 애나는 뉴욕으로 떠나지 않고 올리버의 집 주변에 머물고 있었고 뉴욕까지 자신을 찾아온 올리버를 보며 감동한다. 애나가 열쇠가 숨겨진 곳을 알려주고 올리버는 처음으로 그녀의 공간을 구경하게 된다.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올리버의 집에 다시 애나가 들어 오고 아서가 반긴다. 나란히 앉은 올리버와 애나. 

올리버 : What happens now..?
애나 : I don't know.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냥 한번 가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긴 둘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 감상

비기너스는 (모든 사람의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랑과 인생은 복잡한 것이며,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인생에서 예상치 않은 행복이 다가왔을 때 '기꺼이 뛰어들라! '고 조언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뭔가 활기차고 희망적인 주제이지만 영화 자체는 침울한 감성과 과거에 발목 잡힌 슬픔과 회한이 가득하며 잔잔함 80%와 일탈 20%가 공존하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화자는 주인공 올리버이고 그의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연인 애나와의 관계를 보여주며 영화가 진행된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인생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모두 그 시기가 (혹은 그 사건이, 그 사람이) 처음일 수밖에 없어서 때로는 과거에 짓눌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초심자들을 영화는 담담히 보여준다.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는 침울하면서 사색적인, 과거의 일에서 상처받았지만 겉으로는 매말라 있는 요즘 시대의 젊은이와 많이 닮아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슬픔이 가득하고 반려견 아서에게만 진심을 내보인다. 아서에게 '이것은 내 차야. 여기는 거실이야'하고 가르쳐 주는 그는 아서를 그저 개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아서는 아버지를 함께 추억할 수 있는 형제이며 진심을 말할 수 있는 하나뿐인 존재이다. 아서를 제외하면 미간에 일자 주름을 만든 채 잔뜩 찌푸리고 사는 올리버. 그는 어느 날 파티에서 애나를 만나서 한껏 미소 짓게 된다.

영화 속에서 할은 제일 고령이지만 70여 년 삶의 경력에서 오는 바이브 때문인지 제일 거침없이 삶에 주체적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선택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올리버가 감화된 진정한 사랑은 부모님이 평생을 바친 희생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늙은 아버지와 그의 동성 연인이 거침없이 서로를 웃게 만드는 장면들이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 할이 처해있던 과거 상황에서 '동성애'를 '전염되는' 병으로 취급했는데 감독은 독창적이게 '그래! 전염되고 말고!  '동성'이 아닌 '애(사랑)'가 전염된다! '며 외치는 듯하다. 

올리버와 애나의 사랑은 위태롭고 연약하지만 그들은 '전염'되어 변화한다. 이전과는 다르게 올리버는 애나를 다시 만나고자 대륙을 건너 뉴욕까지 간다. 이전의 올리버라면 분명히 하지 않을 행동임을 애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아버지와 앤디가 그랬던 것처럼 앞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닿는한 같이 있어보는 것을 선택한다. 

결코 눈물을 짜내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마지막에 의외로 내 눈물샘을 빵 터트린것은 할의 연인구함 구인광고였다. 조금은 난잡하기도 호기롭기로 한, 절대 울만한 내용은 아닌데 애나의 대사처럼 마지막까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쟁취하고자 했던 그 노인의 삶의 자세가 감동을 몰고 왔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흐뭇했던 아서의 사진과 함께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