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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by 집구리 2024. 1. 30.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기본 정보

이 영화는 존 보인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마크 허먼 감독이 연출해 2008년 개봉한 드라마 영화이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비극적인 영화를 많지만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주인공 브루노가 독일의 부유층 8살 소년이고 그의 눈으로 나치즘 절멸 수용소를 바라보게 했다는 것이다. 해맑은 8살 소년의 눈으로 본 수용소는 시골의 특이한 농장으로 비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낮에도 파자마를 입고 다니는 어딘가 조금 이상한 사람들일 뿐이다. 

- 줄거리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 시기, 베를린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8살 브루노는 아버지 랄프의 승진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고위 군인으로 유대인 수용소장으로 부임하게 되고 그 때문에 엄마 엘사와 누나 그레텔까지 온 가족이 국경 지역 시골로 이사하게 된다.
이사한 곳은 친구도 없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외출도 자유롭지 않아 브루노는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브루노는 이사 온 날 방의 창으로 멀리 농장처럼 생긴 곳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외출도 등교도 통제당하는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브루노는 미지의 뒷마당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 창밖으로 멀찍이 엿보기만 하던 농장을 기웃거리던 중 철조망 건너로 한 아이를 마주친다. 그의 이름은 슈무엘. 농장 사람들이 맞춰 입은 파자마를 입은 그는 어딘지 위축되어 보인다. 그러나 또래친구를 만난 브루노의 눈에는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이제 친구가 생길 것만 같으니까!
며칠 후 집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브루노는 집 안 다용도실에서 유리잔을 닦고 있는 슈무엘을 마주친다. 유리잔 속에 손이 들어가는 어린이가 필요하대서 왔어. 하는 슈무엘이 브루노는 그저 반갑기만 하다. 브루노는 슈무엘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권하고 슈무엘은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둘의 이런 모습을 독일군 장교 코틀러에게 들키게 되고 슈무엘이 먹고 있는 케이크의 출처를 추궁하는 코틀러가 무서워 브루노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고 만다.
혼란스러움과 죄책감에 뒤섞여 브루노는 슈뮤엘에게 사과하고자 그를 찾아다닌다. 매일같이 철조망 앞에서 진을 치고 그를 기다렸지만 슈무엘은 감감무소식이다. 7일이 지나고 슈무엘은 얼굴에 큰 멍이 든 채 철조망 앞에 나타난다. 브루노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슈무엘이 받아들여 둘은 다시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브루노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랄프는 브루노와 그레텔에게 그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한다. 사실은 어머니 엘사가 창문너머 보이는 곳이 유대인 절멸수용소이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시체소각로의 연기인 것을 알게 되어 랄프를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이사가 결정되고 브루노는 슈무엘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철조망 앞으로 간다. 그곳에서 슈무엘은 아버지가 행진에 참여한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고 브루노는 같이 아버지를 찾아주겠노라고 한다.
이사 당일. 브루노는 어렵사리 가족의 눈을 피해 철조망 아래의 땅을 파고 슈무엘과 수용소로 들어간다. 머리는 모자로 가리고 그들과 같은 파자마를 갈아입은 채로. 슈무엘의 아버지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던 두 아이들은 이윽고 한 행렬에 휩쓸리게 된다. 행렬은 샤워실로 인도되어 옷을 벗으라는 지시를 받는다. 브루노와 슈무엘은 손을 붙잡고 가스실인 샤워장으로 들어간다.
한편 브루노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랄프와 엘사는 병사들과 군견을 동원해 브루노의 뒤를 쫓는다. 군견에 이끌려 브루노의 행적을 따라 도착한 곳은 샤워장. 랄프는 모든 것을 예감하고 울부짖고 그 소리는 들은 엘사 역시 아들의 죽음을 깨닫고 망연자실한다. 브루노와 슈무엘을 포함한 행렬이 죽어간 가스실의 닫힌 문을 끝으로 영화는 마친다.

- 감상

학살은 왜 일어나나. 어느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모든 제노사이드는 첫 번째로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라는 기본 생각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유대인 학살, 르완다 내전, 우리나라에서 일제강점기 때 벌어진 학살도 그 기본 사상은 그들은 우리와 달라.라는 생각이었다. 우리랑 다르니까 더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라서 마치 해충처럼 죽여도 된다를 넘어서 없애는 게 궁극적으로 좋은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의식의 흐름인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이 악마적이고 비상식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주 오래된 일이 아닌 최근 30여 년 전까지(르완다에서의 학살은 1990년대에 이루어졌다.) 한 사회의 정책으로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지구상 모든 민족과 종족을 막론하고 인간이란 왜 이리 악한 존재인지 환멸이 드는 게 사실이다. 더불어 성별, 세대, 민족, 이념에 따라 점점 분리되고 있는 현재를 생각하자니 불안함이 엄습한다.
이 영화는 이런 홀로코스트에 대한 환멸을 순수한 아이의 눈에 투영하여 관객에게 증폭되어 느끼게 한다. 죽은 사람들과 학대당하는 여자와 아이를 보여주는 대신 브루노의 눈을 통해 조금 이상한 농장을 보여준다.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도 모르는 브루노는 지구상에서 제일 어둡고 악한 일이 행해지던 그곳에서 하나의 피해자가 되고 만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을 책임지고 있던 랄프는 소중한 아들을 자기가 지어놓은 가스실에서 잃는다. 그곳에서 사라져 간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들의 가족처럼 가슴을 움켜쥐고 울부짖는다. 학살은 결국 그런 것이다. 그 어느 편에도 이점이란 없다. 절대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된 슬픔. 그 슬픔에서 비롯된 더 큰 분노만이 있을 뿐이다. 뭐 하나 좋은 것 없는 일이 계속 반복된다는 게 가장 비극이다.